거실을 서재로-2 TV를 없애다.

거실을 서재로...

2주 전에 거실의 한 벽면에 책장을 배치하여 서재로 꾸몄었다.
허나 그 때는 반대쪽 벽면에 버젖이 TV가 자리하여 내 손에는 여전히 리모콘이 들려진 채로 2주가 지났었다.

프로야구 개막과 더불어 SK, 롯데의 고공행진과 달라진 LG의 모습, 그리고 이승엽과 이병규가 활약하는 일본야구.
거기다가 5만 관중이 들어찬 K-리그와 맨유와 첼시의 빅뱅이 예고되는 EPL.
올해는 코리안 메이저리거 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MLB.
프로농구 플레이 오프와 연일 50점 대를 기록하는 코비의 NBA ...
결코 리모콘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스포츠의 매력은 거실이 서재로만 활용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막내 처형과 지선이, 성철이가 놀러 오면서 부터 책장과 소파와 TV(거실장)이 함께하는 기형의 거실이 얼마나 우수꽝스러운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퇴근하여 집에 들어 서기 전까지 아이들은 인규랑 책을 꺼내 들고는 서로 바꿔 보기도 하고 좌탁에서 그림도 그리고 했다는데 내가 오자 마자 TV를 틀고는 KBS-PRIME이 어딘지 리모콘을 돌려 대구와 수원의 K-리그 경기를 찾아 보았고, 아이들은 이내 TV로 시선을 돌리곤 스쳐 지나가는 투니버스와 재능방송, 그리고 어린이 TV 등의 채널을 가리키며 나와 채널 쟁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아내와 처형이 중재에 나서 우리는 외식을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대구FC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날 새벽 거실에서 혼자 자던 나는 좀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잠이 깨어 자연스럽게 TV를 켜 보니 마침 영국 FA컵 4강전(맨유:왓포드) 후반이 시작하고 있었고 나는 채널 고정으로 경기를 보고 있었다.

경기는 맨유의 화끈한 골잔치로 승리하였고 나는 박지성이 부상으로 빠진 것을 아쉬워하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휴일 아침이면 평소보다 훨씬 일찍 깨어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워 악으로 깡으로 노는 아이들의 생리를 잘 아는 나는 어렵풋이 들리는 만화 주인공의 목소리가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8시에 기상하여 10시에 어른들이 깨기 전까지 내가 세 채널을 돌려 가면 동시에 스포츠를 보듯 만화 채널을 보며 여유로이 일요일 아침을 즐기고 있었고 나는 한 쪽 구석에서 - 이건 자는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니어(같기도....) - 뒤척이고 있었다.

늦은 기상과 아침을 먹고 멍한 정신으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지금의 기형적인 거실의 모양으로는 책장만 거실로 뺀 실익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첨에 TV를 작은방으로 옮기지 않은 것은 유선이 작은방으로 가지 못하기에 마지막 보루로 거실에 사수한 것인데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처형이 있었지만 아내에게 TV를 옮기자고 제안하니 아내는 처형이 있을 때 한 손이라도 힘이 된다며 당장 하자고 하며 나를 살며시 바라 보았다.

『자기야. 괜찮겠나?
  오늘 부터 자기 못 보는 것 아냐? 이제 부터 작은방에서 안 나오는 것 아니겠지?』


나도 장담 할 수는 없지만 독립운동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침을 꾹 삼키고는 TV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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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TV없는 거실 첫날...
퇴근하여 집에 들어 오니 인규는 요즘 잘 안 가지고 놀던 가베를 꺼내 나무 블럭으로 우리집을 만들었다며 보여주었는데 나름 거실도 있고 방방이 나누었고 중앙 난방이라 현재 없는 보일러도 만들고 나름 집 모양을 한 것이 기특해 보였다.

나는 T9을 앰프에 연결하여 저녁 준비 중인 아내에게 음악을 틀어 주고는 씻으러 들어 갔다.
(평소에는 TV 먼저 틀고 스포츠 채널 확인하고는 별 볼 것 없으면 씻으러 갔었는데...)

저녁을 먹고-셋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며, 참 오늘 인규가 밥상 앞에서도 평소보다 훨씬 얌전했었지 싶네...-
나는 신문 보고, 아내는 책 보고, 인규는 자석블럭으로 팽이 만들어 놀다 자기 전에 동화책 보고는 지금 자고 있다.

아내가 인규 재우는 틈을 타서 나는 작은 방에 잠입하여 뉴스와 스포츠 뉴스를 잠깐 보고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TV에 유선을 연결하고 나면 아내와 인규가 나를 거실에서 볼 수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유선을 연결할 지 결정하지 못하였고, 아마 연결하더라도 TV를 통한 스포츠 중계 보는 것 보다는 인규 손 잡고 경기장을 더 많이 찾을 생각을 지금은 하고 있다.

TV에서 좀더 자유로와 지고 억지로라도 책을 읽고, 신문을 보고, 짬짬이 공부도 하고, 가족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길 기대하며 우리 가족 손으로 꾸민 거실, 아니 서재에서 오늘을 마감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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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공 | 2007/04/16 23:05 | 꼬지지 궁상일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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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모난돌 at 2009/09/03 14:10
거실을 서재로 만들 생각에 여기저기 검색하고 있는데 커다란 TV를 어쩔까 고민하던 중 제 맘에 쏙 드는 경험담을 발견했네요. 저도 밤새도록 축구보는 거 좋아하는데 맘 굳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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